충절록(忠節錄)

 
유당공 한유후(柳塘公 韓有後 : 宣祖33年(1600)∼仁祖22年(1644) 19世)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의인(義人)이다. 휘(諱)는 유후(有後)이고 자(字)는 흥백(興伯)이고 호(號)는 유당(柳塘)이다. 통덕랑공 성(通德郞公 誠)의 아들이고 사직공 여익(司直公 汝益)의 손자 이며 참판공 계선(參判公 繼善) 의 5대손이다. 어머니는 함열 남궁씨(咸悅 南宮氏) 로 무공랑 건(務功郞 建)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宣祖) 33년(1600) 2월 25일 생이다. 성품(性稟)이 강개(慷慨 :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정의심(正義心)이 북받치어 슬퍼하고 한탄함)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그리고 벼슬을 싫어하고 대명처사(大明處士)로서 세칭(世稱) 하였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민간인 신분(民間人身分)으로 의리(義理)로써 항전 (抗戰)하여 충절(忠節)을 세운 3인이 있었으니 두곡 홍우정(杜谷 洪宇定 ,亂후에 國朝의 恩典을받음),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亂후에 書院에 配享) 그리고 공(公)이다. 그러나 공의 명예(名譽)는 세상에 현양(顯揚) 되지 못했다.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홍천(洪川)으로 피난하였을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이 청병(淸兵)에게 포위(包圍) 당하고 함락(陷落) 되니 인조왕은 항서(降書)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공은 북천(北天)을 향하여 삼주야(三晝夜)를 통곡하였다. 병란(兵亂)이 평정 되었으나 서울 본가(本家)로 돌아가지 않고 호남(湖南)의 함라현(咸羅縣)에 은둔(隱遁) 하여 자기집에 살면서 경사(經史)를 학습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하여 덕행(德行)이 일취(日就) 하고 학식(學識)이 고매(高邁) 하니 누차 관직(官職)에 천임(薦任)되었으나 취임(就任) 하지 않았다.
양주(楊州)의 선조 참배(先祖參拜)때나 기거(起居)할 때는 물론 중신(終身)토록 청(淸)나라를 등지며 서향(西向)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패, 백패(紅牌, 白牌)에 오랑캐 청(淸)나라 연호(年號)를 쓰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仁祖) 22년(1644) 1월14일 45세로 졸하니 정조(正祖) 3년(1779)에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朝奉大夫 司憲府 持平)을 추증(追贈) 하였다. 배위(配位)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선무랑공 극검(宣武郞公 克儉)의 따님이고, 아들은 증좌승지 석휴(贈左承旨 碩休), 석태(碩台),석좌(碩佐)이다. 공이 인조(仁祖) 22년(1644) 1월14일에 졸하고 배 전주리씨(配 全州李氏)는 공보다 4일 전에 졸하니 상장리 산91 막곡 갑좌(上長里 山91 幕谷 甲坐)에 합조(合兆)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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