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부사공 한흡(府使公 韓 洽 : 明宗 4年(1546)∼ 光海 1年(1609) 18世)
공(公)의 휘(諱)는 흡(洽)이고 자(字)는 유여(有餘)이다. 호은공 삼걸(湖隱公 三傑)의 아들이고 부사공 순명(府使公 舜命)의 손자이며 절제공 중손(節制公 仲孫)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영인 남원양씨(令人 南原 梁氏)로 참봉 인숙(參奉 仁淑)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 1년(1546) 생으로 벼슬 길에 올라 사마직장(司馬直長), 형조정랑(形曹正郞),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귀성부사(龜城府使)를 지내고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로 승차(陞差 : 같은 관청에서 윗자리 벼슬로 오름)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적(賊)이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를 유린(蹂躪)하였을 때 분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병병단충(炳炳丹忠)으로 호서(湖西) 각처의 뜻있는 선비들과 의논하여 홍성(洪城)에서 창의(倡義)하고 “신자(臣子)들이여 종묘사직과 생민(生民)의 화(禍)가 조석(朝夕)에 급박하니 차마 보지 못하고 대의(大義)를 천하(天下)에 펴고자 할진대 진실로 우리 한몸이 나라를 위해 죽음을 당하고 삶을 보지 못하더라도 신천(神天)이 돕는 바에 어찌 급히 이룰 수 없겠는가”하고 솔제생(率諸生)하여 행진삼일(行進三日)에 금주대첩(錦州大捷)에 이르러 대의위공(大義偉功)을 펴던중 여러번 피압(被狎) 당했다가 방환(放還)되었다 만년(晩年)에 장사 오리동 방라산지우(長沙 五里洞 坊羅山之隅)에서 무경역색조월영풍(務耕力穡釣月詠風)으로 지락(至樂)을 삼다가 광해 (光海)1년 1월 8일 64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 숙부인 경주 김씨(淑夫人 慶州 金氏)는 봉정 경남(奉正 景南)의 따님이고 아들은 부사 경(府使 景), 봉정 욱(奉正 昱)이다. 공의 배위 숙부인 경주 김씨( 配位 淑夫人 慶州 金氏)가 광해(光海) 1년(1609) 11월 16일 졸함에 나산 후록(羅山 後麓)에 쌍조(雙兆)되었다. 화담 서경덕 찬지(花潭 徐敬德 撰誌)이고 진주인 정익환(晋州人 鄭益煥)이 비문을 지었다 비갈(碑碣)은 마훼(磨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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