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통덕랑공 한성헌(通德郞公 韓聖憲 : 인조 24년(1646) ~숙종 46년(1720) 25세)
공의 휘(諱)는 성헌(聖憲)이고 자는 집중(執中)이요 호는 제광(霽光)이다. 통덕랑공 익형(通德郞公 益亨)의 아들이고 별좌공 진영(別坐公 震英)의 손자이며 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12대손이다. 공은 인조 24년(1646) 8월 16일 유기 방정리(遺基 方井里)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학업을 좋아하고 소시절(少時節)부터 봉선지절(奉先之節)이 두터웠더니 숙종조에서 통덕랑(通德郞 : 조선조 때 문관의 품계)에 이르렀다.
공은 8남매 중의 장남으로 다음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鄕里)인 방정리에 돌아와 향학과 유업(遺業)의 계승, 후손 계도(後孫 啓導)에 진성(盡誠)하더니 유기(遺基)에 살면서 시조 유택(始祖 幽宅)의 실호(失護)를 통분(痛憤)하여 묘재 가산(墓在 嘉山)이라는 문적(文跡)만을 보고 행보(行步)로 평안도 가산, 충청도 회인 가산, 등지를 역수광구(力搜廣求) 하더니 숙종 14년(1688)에 청주 가산에서 묘징(墓徵)을 우득(遇得)하여 급기야(及其也) 시조묘소(始祖墓所)를 청주병마절도사 한근(淸州兵馬節度使 韓根)과 합심전력(合心全力)하여 청원군 남일면 가산(淸原郡 南一面 駕山)에서 심득(尋得) 하였으니 오한(吾韓)에 대한 불후(不朽)의 공적(功績)은 영세불망(永世不忘)이리라. 이에 치제전(置祭田)과 개봉축(改封築) 등의 수호책(守護策)은 물론 시조유적 (始祖遺蹟)인 방정(方井), 무농정(務農亭) 등의 정화(淨化)도 이어나갔다.
공은 문장력(文章力)이나 시(詩)에도 뛰어나 제방방정리척매기(堤防方井里斥賣記), 척매방정제방시(斥賣方井堤防詩), 명명자손설(命名子孫說), 감흥인유소기(感興因有所期), 제광부(霽光賦) 등의 유고(遺稿)는 오늘날 후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숙종 46년(1720) 2월 9일 졸하니 수(壽) 75세이다. 배위는 공인 전주 이씨(恭人 全州 李氏), 공인 고령 신씨(恭人 高靈 申氏), 공인 경주 김씨(恭人 慶州 金氏)이고 아들은 병(棅)과 진사 건(進士 楗), 정(정, 无后)이다. 공이 졸함에 방정리 고소(方井里 古巢)를 떠나 온천리(溫泉里) 산 38-1 갑좌(甲坐)에 동년 3월 14일에 안장(安葬)되었다. 배위(配位) 공인 전주 이씨(恭人 全州 李氏)는 숙종(肅宗) 13년(1687) 12월 27일에 졸함에 청주 월오동에 초장(初葬)되었다가 순조 2년(1802) 봄에 공묘(公墓)로 합조(合兆) 되었다. 후배(後配) 공인 고령 신씨(恭人 高靈 申氏)는 숙종 34년(1708) 4월 20일에 졸하니 청주 가산(淸州 嘉山)에 초장하였다가 1973년 4월에 공묘(公墓)와 삼합조(三合兆)되었으며 계배(繼配) 공인 경주 김씨(恭人 慶州 金氏)는 공묘북록(公墓北麓)에 별봉(別封)으로 안장되었다. 묘표(墓表) 등 석물(石物)이 있다.
묘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38-1 세향일 음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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