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시와공 한태동(是窩公 韓泰東 : 인조 24년(1646)~숙종 13년(1687) 22세)
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휘(諱)는 태동(泰東)이고 자는 노첨(魯詹)이며 호는 시와(是窩)이다. 장령공 진(掌令公 縝)의 아들이고 현감공 위겸(縣監公 위謙)의 손자이며, 감사공 전(監司公 전)의 9대손이다. 공은 인조 24년(1646)생이다. 현종 7년(1666) 생원이 되고 동왕 10년(1669) 정시 문과(庭試 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동왕 14년(1673)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뒤 숙종 6년(1680) 지평(持平) 겸 지제교(知製敎 : 조선조 때 임금이 반포하던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가 되었고 1682년 진주사 서장관(陳奏使 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고 장령(掌令), 집의(輯義)를 지냈다.
1683년사성(司成)으로 있으면서 남학교수(南學敎受)를 겸하였는데 글씨를 잘쓰고 문장(文章)됨이 기기(奇氣)가 탁월(卓越)하여 송(宋)나라 팔대가(八大家)인 유자후(柳子厚)와 같다고 하였다. 6월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로 있을 때 서인(西人)의 과격파 김익훈(金益勳), 김석주(金錫胄) 등이 남인(南人)의 발본색원(拔本塞源)을 위하여 남인역모설을 조작하자 같은 서인으로서 조지겸(趙持謙)등 소장파와 함계 그 흉계를 폭로하고 처형을 주장하였다가 이듬해 파직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은 김익훈 등을 옹호하는 노장파(老壯派)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졌다. 공은 1684 집의(執義)로 복직되었는데 이는 병판 남약천(兵判 南藥泉)의 상소(上疏)의 힘을 입었다. 파직과 복직을 여러번 거듭하면서 1685년 부수찬(副修撰), 헌납(獻納)을 지내다가 다음해 집의(執義)와 사간(司諫)을 지냈다. 숙종 13년(1687) 10월 2일 졸하니 향년(享年) 42이었다. 공의 청백강직(淸白剛直)한 절조(節操)를 포상(褒常)하여 부인 죽산안씨(夫人 竹山 安氏)에게 매월 녹봉(每月 祿俸)을 주었다.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며 배위(配位) 증 정부인 연일 정씨(贈 貞夫人 延日 鄭氏)는 영한(榮漢)의 따님이고 후배 증 정부인 죽산 안씨(贈貞 夫人 竹山 安氏)는 적(績)의 따님이며 아들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월악(月嶽) 지(祉)이다.
집의시 피혐소계(執義時 避嫌訴啓)를 상소(上訴)하여 세상에 유명하다. 공이 공주시 서면 웅진서혈봉하 병좌(公州市 西面 熊津西穴峰下 丙坐)에 안장되니 영상 이종성(領相 李宗城)이 지명을 찬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어떤사유로 모르게 묻어버렸다. 후배 증 정부인 죽산 안씨는 영조 7년(1731) 7월 8일 졸하니 공묘와 합조하였다. 후세에 어떤 사화가 있을까 염려되어 신도비를 매안(埋安)하였다는 전언(傳言)으로 그 장소는 확인이 안되어서 1982년에 영상 이종성의 명문(銘文)으로 비를 세웠다. 공(公)의초배(初配)증 정부인 연일 정씨(贈 貞夫人 迎日 鄭氏)는 영조(英祖) 17년(1741) 5월 27일 졸하니 공주 월성 산하 효가 해좌(公州 月城 山下 孝家 亥坐)에 홀로 안장(安葬)하였다.
묘 : 충청남도 공주시 서면 웅진 서면 혈봉하 병좌 세향일 :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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