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진산공 한용국(振山公 韓用國 : 1906∼1959)
한말의 의병, 자는 주언(周彦), 응오공 병규(應吾公 秉奎)의 아들로 치원공 동수(致元公 東洙)의 손자이다. 공은 경북 문경출신으로 총명강직(總明剛直)하고 인품(人品)이 출중(出衆 : 여러 사람 속에서 뛰어남)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전념(專念)하여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므로써 충효사상(忠孝思想)이 특출(特出 : 특별히 뛰어남)하였다. 1895년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할 목적으로 국권(國權 : 주권과 통치권) 을 침해(侵害)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비참(悲慘)하게 시해(弑害 : 부모나 임금을 죽임)한 것을 보고 전국민이 국력(國力)의 약(弱)함을 비탄(悲歎 : 슬퍼하여 탄식함)하며 그 행위(行爲)를 비분(悲憤)하고 있을 때인지라 공도 이를 보고 비애(悲哀)와 울분(鬱憤 : 쌓여 풀리지 않는 분노)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의거(義擧)한 의병대장(義兵隊長) 이강년(李康秊)의 휘하(摩下)에 참모관(參謀官)으로 있으면서 서상업(徐相業), 허달(許達), 한양리(韓良履) 등 20여명의 지사(志士)들과 함께 각지(各地)에 있는 일병(日兵)을 습격(襲擊)하는 등 항일투쟁에 많은 활약(活躍)을 하던 중 불행히도 일병에 패(敗)하여 단양(丹陽) 산중(山中)에 은거(隱居 : 세상을 피하여 삶)하면서 재기(再起 : 다시 일어남)의 기회(機會)를 도모(圖謀)하였다가 1907년 이강년을 도 창의대장(都 倡儀大將)으로 추대(推戴)하고 그 휘하에서 40여명의 지사들과 함께 청풍(淸風), 황강(黃江), 문경(聞慶), 제천(提川), 영천(永川), 간성(杆城), 인제(麟蹄), 안동(安東), 내성(乃城), 영주(榮州), 이천(利川), 장호원(長湖院), 양근(楊根), 진천(鎭川) 등지(等地)를 전전(轉戰)하면서 많은 일병을 사살(射殺)하였다. 그러던 중 체포되었다가 탈출(脫出)하여 산중에서 은거하다 해방후 자유의 몸이 되어 1959년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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