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돈암공 한승리(돈菴公 韓承利 : 1477~1536)
 공의 자는 수지(遂之)요 호는 돈암(돈菴)이니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낸 사무(士武)의 아들이요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손자이다. 문한 청백(文翰 淸白)으로 성망(聲望)이 높은 가문(家門)에 태어나 음사(蔭仕) 하여 충좌위 부사직(忠佐衛 副司直)에 올랐으나 연산(燕山)의 난정(亂政)을 피하여 은둔자적(隱遁自適)함이 처세(處世)에 마땅함이라 판단(判斷) 하여 진양땅 정수(晋陽丁樹)에 터를 잡으니 곧 한촌(韓村)을 이룬 시초이다. 진양지(晋陽誌)에 돈암공은 고결(高潔)한 기품(氣稟)을 지닌 지조(志操)가 굳은 인물(人物)로 소개되고 있듯이 공은 환정(宦情 : 벼슬할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學問)을 연마(鍊磨)하고 시경(詩經)을 두루 익혀 후진(後進) 계발(啓發)에 전념(專念)하여 학행(學行)으로 명망(名望)이 사위(四圍)에 높았다. 당대의 석학 정여창(鄭汝昌), 조식(曺植) 선생과 교유(交遊)하였으니 이로부터 후손 중에는 명유 박학(名儒 博學)이 배출(輩出) 되었다. 공이 중종 32년 10월 28일에 별세 하니 수(壽)가 60이다. 배위 수양 오씨(首陽 吳氏)는 공묘동원(公墓同原)에 쌍조(雙兆)이고 시향(時享)은 음 10월 10일이다. 공이 낙남은둔(落南隱遁) 하여 비록 청한처사(淸寒處士)이나 고절(高節)한 기개(氣慨)와 학행(學行)이 제세(濟世) 안민(安民)의 표상(表像)으로 추앙(推仰)을 받으니 가(可)히 문한(文翰)의 후예를 손색(遜色)이 없었다. 공이 처음 낙향(落鄕) 하여 이 재실(齋室)터에 살았다 하여 재호(齋號)를 천산재(天山齋)라 하였고 후손들과 이 고을 선비들이 뜻을 모아 건립 하였으며 매년 음 3월 15일에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고 후생(後生) 교화(敎化)를 위한 강례(講禮)를 베푼다.
묘:경남 진양군 이반성면 평촌리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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