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청련공 한지원(靑蓮公 韓智源 : 중종 9년(1514)~명종 15년(1560) 17세)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지원(智源)이고 자는 사달(士達)이며 호는 청련(靑蓮)이다. 도정공 석(都政公 碩)의 아들이고 삼등공 사신(三登公 士信)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증손자(曾孫子)이다. 어머니 정부인 파평 윤씨 (貞夫人 坡平 尹氏)로 증 이판공 지준(贈 吏判公 之俊)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 9년(1514) 11월 30일생이다. 중종 32년(1537)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39년(1544) 별시문과병과(別試文科丙科)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정자(正字)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명종 3년(1548)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교리(校理) 겸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 기주관(記注官) 지제고(知制誥)가 되어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뒤 지평(持平), 교리(校理),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명종 8년(1553년)에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家讀書)하였고 이때에 지은 조정암(趙靜庵) 선생의 신원상소(伸寃上疏)는 관학제유(館學諸儒)의 찬탄(讚嘆)하는 바 되어 사림(士林)은 물론 세인(世人)이 감탄(感歎)하였다. 그러나 윤원형(尹元衡)등 권신(權臣)에 아부하여 탐학(貪虐)을 일삼았다는 탄핵(彈劾)을 받고 사직(辭職)하였다가 사실(事實)이 아님이 판명(判明)되어 1555년 복관(復官)되자 그 높은 지개(志槪)에 세인이 모두 감탄하였다. 명종 12년(1557)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된 뒤 박천군수(博川郡守), 인천부사(仁川府使) 등의 외직(外職)을 역임(歷任) 하였다. 공의 문장이 뛰어나 시문은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의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삼체집 서문(三體集 序文)에 보면 윤결(尹潔)과 재명동시(齋名同時)하였다고 하며 송나라의 문장가 삼소(三蘇 : 蘇洵과 그의 아들 蘇軾, 蘇轍의 세 父子를 말함)에 비긴다고 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當代) 최고의 문학사(文學士)로 추앙받았다.
후에 공의 손자 율헌공 명욱(栗軒公 明勖)이 간행(刊行)한 《삼체집(三體集)》에는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동주 이민구(東洲 李敏求)가 찬서(撰書)하였다. 명종 15년(1560) 7월 11일 졸하니 향년 47세였다. 아드님 도곡공 술(陶谷公 述)의 본작(本爵) 및 양란(兩亂)의 호성원종(扈聖原從) 지공(之功)과 청난(淸難:李夢鶴의 亂)의 공으로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빈객(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經筵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 藝文館 大堤學 世子左賓客)이다. 배위(配位) 증 정부인 무송 윤씨(贈 貞夫人 茂松 尹氏)는 감찰공 박(監察公 璞)의 따님이다. 아들은 도곡공 술(陶谷公 述)과 태항공 회(太巷公 懷)이다.
두 아들 모두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국난(國難)을 당하여 두 아들이 함께 호성원종지공(扈聖原從之攻)을 행(行)하였다. 공은 율동 후산 자좌(栗洞 後山 子坐)에 안장(安葬)되었는데 하조(下兆)이다. 지문(誌文)이 있으며 손자인 율헌 명욱(栗軒 明勖)이 묘표(墓表)를 찬(撰)하였다.공의 배 증 정부인 무송 윤씨(贈 貞夫人 茂松 尹氏)는 ○○년 12월 10일 86세로 장수(長壽)하니 공묘(公墓)의 뒤(上兆)에 안장(安葬)되었다. 공의 묘비(墓碑 : 栗軒 明勖 撰)가 마멸(摩滅) 상태에 이르니 1986년 3월 개수(改竪)하였다.
비문(碑文) 내용은 구비(舊碑)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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